칼퇴근을 마지막으로 언제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. 

한 날이 있긴 있었나. 야근 끝나면 밤 10시 넘더라고. 회사만 짜증 난다면 몰라, 인간관계가 얼마나 싫증이 나는데. 

저 사람과 저 사람이 친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철천지원수라던가, 칼퇴근도 안 시켜주는 윗놈들 생일을 챙겨야 된다던가, 같이 뒷담을 하지 않으면 내가 희생양이 된다던가.

사회생활과 인간관계란 사슬에 발이 묶여 하루하루 살다 보면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더라.


 ' 내 인생은 왜 이럴까. '

' 왜 난 이렇게 힘들게 일해야 하지? ' ,  

' 꿈이 뭐였지? 나한테 꿈이 있기는 했던가. ' ,  

' 내가 선택한 길인데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지? 왜 이렇게 지치지? '

' 사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게 아닐까?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? ' ,

' 남들은 이렇지 않던데, 난 이런 걸로도 지치다니 되게 한심하다. ' 


등등. 

하지만 그걸 하나씩 풀다 보면 생각이 끝이 없어서, 심해에 빠지는 것처럼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아. 응? 괜찮냐고? 

괜찮아. 그때마다 난 어릴 때 할머니를 만나러 놀러 갔었던 마을 하나를 떠올려. 그럼 기운이 나.



풍경만으로도 동화 같은 곳이었어. 

산과 호수가 둘 다 있고 마을의 모든 나무가 동백나무였어. 꽃이 만개하는 건 보지 못했지만 그 대신 아침마다 수탉의 울음소리로 깨는 사람들과, 밭을 가는 소와, 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똑똑히 봤어.

감자라도 큰 걸 건졌다 하면 마을은 완전 축제 분위기에, 마을이 좁아선지 이웃사람 전부가 그렇게 친하더라. 내가 그 마을에 지냈을 땐 마을 스피커로  빨간 집 산서댁네 누렁이가 새끼 낳았다는 말도 들었을 정도야.

밤이 되면 밤하늘에 별이 가득 수 놓아지고, 호수 근처에선 촛불 같은 반딧불이도 볼 수 있어. 너무 농촌이어서 흔한 편의점도 없다는 게 무지 불편하긴 했지만... 뭐랄까. 



그곳에 있는 동안 난 내 하루하루가 몰래 훔쳐보는 일기처럼 아주 재미있는 한 권의 이야기 같았어.


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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근데 그러는 너야말로 요즘 어떻게 지내?

아이가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다고?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구나.

...하긴 네 말이 맞다. 요즘 미세먼지니 뭐니 애 몸에 안 좋은 게 너무 많지.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학교라. 


흠.


있잖아, 그럼 내가 말한 마을에서 키워보지 않을래? 초등학교, 중학교, 고등학교는 좀 떨어져 있지만 다 있거든. 또 혹시 모르지.





그곳에서 네 아이가 생각지 못한 인연을 만나게 될지도!